‘해체’ 또는 ‘퓨전’ 산수화의 모색    
  운영자 날짜 : 2008-05-14 00:00:00 조회수 : 443
 
 
‘해체’ 또는 ‘퓨전’ 산수화의 모색

오 세 권 (미술평론가, 대진대학교 교수)


1.

한국화에서 ‘전통성’과 ‘동시대성’ 그리고 ‘실험성’ 이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해결하려는 논의는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것 같지만 논의만 무성할 뿐 실질적인 해결방안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서양화에 비하여 항상 ‘시대성’에 있어서 뒤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화’라는 정체성과 용어의 개념조차도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용어라고 공격을 받고 있으며 그냥 ‘회화’ 또는 ‘평면’이라는 용어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서양화 분야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시대성에 맞추어 변화를 보이는 가운데 영상, 설치, 행위, 사진 등의 영역을 자유롭게 오고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데 비하여 한국화 분야에서는 ‘한국화’라는 용어로 자기 한계를 정하여 전통 재료에만 매달리고 있으니 활동 영역에 있어서 그 한계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이러한 논의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기에 연구와 방법의 논의가 계속 이어질수 밖에 없다.

그러한 가운데 근래 들어 나타나는 한국화의 방법론은 1980년대 후반기 무렵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 이후 지금까지 막혀있던 답답함이 다소 해소되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동안 서양표현의 방법론들이 섞여들면서 차별화가 없고 정체성마저 모호했는데 근래 들어 나타나는 한국화의 표현에서는 서양화와는 다른 한국화만의 차이가 있는 새로운 싹이 보이는 듯 하다.

2000년대 들어 '네오 팝'( Neo Pop) 현상과 맞물리면서 한국화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캐릭터 등을 통하여 나타나는 표현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앞서서 나타내는 자발적인 표현이 되지는 못하였지만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러한 표현이 바탕 되어 한국화는 전통적인 표현에서 동시대적인 새로운 조형 형식으로 바뀌고 있음은 보기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에 몇 몇의 작가들에게서 보여지는 해체된 새로운 산수풍경 또는 퓨전적인 산수풍경의 표현은 자유롭고 시대적 함의성이 담겨있는 새로운 양식으로 생각된다.



2.



왕형열의 작품세계를 여러 방향에서 접근하고 특성을 밝혀낼 수 있겠지만 필자는 몇 가지의 특성들에 관해서만 간단하게 논의해 보고자 한다.







해체 산수풍경화 또는 퓨전 산수풍경화



1910년 무렵 일본의 강제점령기가 시작되면서 이전부터 이어오던 전통 한국화와 관념적인 중국화풍 그리고 새로운 일본화풍, 유입된 서구의 화풍 등 다양한 화풍들이 서로 뒤섞이지만 점차적으로 일본화풍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1919년 경에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중화가였던 조석진과 안중식이 타계하면서 조선의 궁중 회화는 종말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당시 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서화미술원>에서 배출된 작가들에 의해 그들의 영향은 계속 이어져 오늘날까지 한국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바탕이 되고 있다.



일본 강제 점령기에서 벗어나 광복 그리고 한국전쟁 등의 고난을 겪고 현재에 이르는 가운데에서도 한국화에서 산수풍경의 변화는 약 10년 주기로 조금씩 변화한 것을 보게 된다. 광복 후 1950-1960년대 한국화에 있어 산수풍경은 일본 잔재 양식에서 벗어난 이상범과 변관식이라는 뛰어난 작가들이 입지를 굳히게 된다. 조선조 정선 등의 실경 산수화의 전통을 이어 받아 근대적인 한국적 실경의 산수풍경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경적인 요소인 관념성이 남아있는 산수풍경의 표현이었다. 1970년대가 되면 이상범과 변관식의 표현을 발전시킨 이영찬, 하태진, 김동수, 정하경, 조평휘, ... 등의 표현이 주목된다. 이들은 당시 서양화의 사실적인 자연 풍경 표현에 영향 받아 한국적인 산수풍경의 표현을 위하여 주변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를 현대적 산수풍경화의 정착기라고 볼 수 있다. 1980년대에는 수묵화 운동에 힘입어 송수남 이철량, 신산옥, 문봉선, ... 등의 자연 산수와 도시의 일부분을 나타내는 도시풍경이 뒤섞여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때를 수묵 산수.도시풍경의 표현 시기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기를 넘어서부터 1990년대까지는 박대성, 오용길, 이선우, 김문식, ... 등의 작품과 같이 현장 사생 풍경이 특성으로 나타난다. 이 때는 어느 풍경 현장을 끌어당겨 사진을 찍은 것 같은 현장성 있는 풍경을 표현 하였다.



2000년대가 진행되면서 자유로운 필법과 재료 그리고 상상적 표현으로 기존의 산수풍경화와는 다른 새로운 경향이 진행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해체 산수풍경’ 또는 ‘퓨전 산수풍경’ 등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해체 산수풍경’ 또는 ‘퓨전 산수풍경’이란 기존의 전통 산수화 표현에서 벗어난 것으로 전통 필법을 무시하고 자유스럽게 표현하거나, 한국화의 기존 재료를 넘어 아크맄 등 서양재료를 사용하기도 하고, 기존의 전통 산수화를 재해석하여 오브제로 끌어들이기도 하며, 산수풍경과 동시대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일상성이 복합적으로 구성되기도 하는데 대체로 표현 재료와 내용들이 융합되어 있는 새로운 산수풍경의 경향이다. 이러한 경향의 작가들은 박병춘, 왕형열, 이구용, 김봄, 김범석, ... 등인데 기존의 전통적인 산수풍경화의 표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근래 왕형열이 보이고 있는 작품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기존의 산수풍경을 바탕으로 하면서 새롭게 구성해 보이고 있는 ‘해체 산수풍경’ ‘또는 ‘퓨전 산수풍경’의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왕형열은 전통 산수화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재해석하면서 기존 산수풍경의 표현방법을 해체시켜 버린다. 먼저 그의 작품을 제작하는 재료부터가 기존의 산수풍경과는 다르다. 바탕 재료는 천을 사용하는데 천 위에 전통 먹 뿐 아니라 아크맄, 젯소, 금분, 은분, 미디움, 바니쉬 등 다양한 혼합재료를 사용한다. 그리고 혼합재료로 사용된 바탕위에 전통적 필선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낸다.



그의 새로운 산수풍경의 작품은 바탕이 빨간색이나 파란색으로 된 것이 특징인데 빨간색이나 파란색의 바탕위에 전통적인 우리 산수화를 약간 변용시켜 그대로 모사하듯이 그려낸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전통 탱화에서 나타나는 금(金)탱화, 홍(紅)탱화와 다소 비슷한 점이 있으나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들과는 다른 새롭게 해석된 산수풍경의 멋을 보여준다.



그는 아크맄으로 처리된 빨간색이나 파란색 바탕의 화판 위에 검은색이나 회색 또는 금색으로 산수의 준을 나타내고 계곡에서 떨어지는 흰 물줄기를 강하게 표현해 낸다. 바탕이 아크맄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한지에서 나타나는 발묵이나 파묵의 효과는 잘 표현되지 않는다. 이때까지 산수풍경화는 흰 한지를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만 보아오다가 눈이 아플 정도로 색상의 명도와 채도가 높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바탕에 검정 또는 회색의 선으로 처리된 산수풍경은 새로운 파격적 효과를 준다. 그리고 빨간색이나 파란색이 주는 여백도 흰색이 주는 여백에 못지않은 함축과 생략 그리고 원근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와 같은 해체적이고 퓨전적인 산수풍경의 표현은 전통적인 한지와 먹에 의한 산수풍경을 익혀야만 시도해볼 수 있는 새로운 표현이다. 동양 산수풍경의 전통성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재료 위에 새로운 선묘의 효과를 실험적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전통 산수풍경의 부분을 재해석하여 그려내거나 약간 왜곡시켜 재료나 형식면에서 새로움을 보였다면 앞으로는 내용면에 있어서 새로움을 시도해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왕형열의 작품 주제 가운데 한 가지는 ‘새’이다. 그의 작품에서 새는 도시의 구석진 골목들을 표현한 <겨울나기> 연작 이후부터 사용되어 오랫동안 상징적인 소재로 자리 잡고 있다. 왕형열 본인은 “처음에는 화면 구성을 위하여 ‘새’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용하다보니 새가 나의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면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새가 중심이 되고 다른 것은 배경으로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이제 나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새’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상징체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어느새 새가 나의 작품에서 중심이 된 것이다.” 라고 말한다.



새는 활짝 웃기도 하고 슬퍼서 울기도 한다. 그리고 혼자 날아다니기도 하고 짝을 지어 다니기도 한다. 그냥 멍하니 서있기도 하고 훨훨 춤을 추기도 한다. 여기서 ‘새’는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적 형태인 것은 이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풍경화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제로 담은 ‘겨울나기’와 같이 여러 사람들이 서로 모여 웃고, 울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삶의 형상들을 ‘새’라는 상징체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새는 연약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한 힘을 지닌 상징체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새의 형상에서 보여 지는 외연적인 것이고, 그 내포는 새와 자연을 통하여 도시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행복과 고독 그리고 동행 등 다양한 희.노.애.락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2000년대 초반기 그를 만날 때부터 그의 작품에서 새를 죽이지 않으면 작품이 새롭게 나아가지 않을 것 같은데 새를 없애 버리는 것이 어떻겠는가? 새를 너무 오랫동안 그려 이제 왕형열이 새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새가 왕형열을 이끌어 가고 있으니 빨리 사라지게 했으면 좋겠다고 매번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때 마다 그는 필자의 말에 공감하면서 새를 빨리 죽여 술안주라도 만들어야 할 텐데 새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어 쉽게 죽이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새를 죽여 없애 버리면 그 새를 대체할 것은 무엇일까 ? ... 죽여 없애야 하는데도 없애지 못하는 그의 마음은 의견을 제시하는 필자보다 더한 조급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새’가 죽고 사는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 같다.







실험성



그 동안 왕형열의 작품세계를 보면 한국화가 직면한 당시대의 시기별 특성에 접근하기 위하여 많은 실험을 보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표현을 동시대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동시대적 조형성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노력이 이어졌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작가활동으로 초기라고 볼 수 있는 1980년대 중반기부터 1990년대 초반기까지는 당시 유행하던 수묵화를 통하여 <겨울나기> 연작을 시도하였다. 도시의 모퉁이나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을 발묵과 파묵의 효과를 이용한 수묵을 중심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당시 유행하던 수묵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채색화를 표현하기 시작하는데 수묵화에서 채색화로 변화한 것은 당시 한국화의 기류가 채색화로 나아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가운데 1990년대 중반기에는 큰 바위돌을 FRP로 떠내어 오브제로 제시하였다. 큰 바위돌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흔적은 마치 노인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주름살 같은 세월의 흔적들을 그대로 FRP로 기록하듯이 복제해 내었는데 당시 한국화 작가로서는 획기적인 실험의 작품들 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기에는 분할화면을 사용하고, 서로 다른 내용의 이미지를 겹쳐지게 표현하는가 하면, 구체적 형상이 있는 화면과 추상 화면을 나란히 배치하는 등 중층적으로 구성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구조화된 작품을 표현하였다. 200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는 전통 재료인 한지나 먹을 이용하지 않고 천과 아크맄, 채색을 이용한 새로운 산수풍경을 표현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동시대 산수풍경화의 일종으로 해체적이고 퓨전적인 산수풍경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변화에서 볼 수 있는 점은 왕형열은 한 가지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조형형식의 표현을 위하여 항상 실험하고 노력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즉 생각하고 실천하는 속도가 빠르며 하나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또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는 작가인 것이다.















3



필자가 왕형열의 작업실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기 마포구 신수동에 있었던 작업실 부터였다. 그 당시 작품전 준비에 바빴던 그의 화실에는 대형 화판들이 많이 펼쳐져 있었고 저녁 무렵이면 가끔 식사를 같이 하면서 작품을 보기도 하였다. 그 때 느낌은 그가 작품을 무척 빠르게 완성하고 다작을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하여도 빈 화판이었는데 하루 밤 사이에 거의 완성되어가는 작품을 보면서 그 작품은 어디 구석에 숨겨놓았다가 지금 꺼낸 것이냐고 물으면 어제 밤사이에 그린 것이라고 대답하였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용인 수지의 신봉동 골짜기에 있던 작업실에는 필자의 집이 가까웠기에 더욱 자주 찾게 되었다. 휴일이나 한가한 밤에 찾아가곤 하였는데 밤늦게라도 전화하면 항상 불을 밝히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약 4년이나 된다. 특히 작업실 주변은 인적이 없는 골짜기와 같았는데 봄이 되면 밤꽃 냄새를 풍기는 밤공기가 맑고 부드러웠고, 여름에는 앞산에서 매미들이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가을에는 단풍이 작업실 주변을 덮었으며 겨울날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차가 움직이지 못해 골짜기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머물러 있어야 했던 곳이다. 그러한 신봉동 작업실에서는 많은 작업량의 성과가 있었고 변화도 있었다. 근자에 신봉동 작업실이 도시계획에 편입됨에 따라 다시 판교 신도시 옆 고기리 골짜기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사를 간지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벌써 많은 작품들을 쌓아 놓고 있었다. 한 마디로 부지런한 작가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새로운 작품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것이다. 이는 작품 판매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연구하고 생각하는 작품세계를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왕형열은 그러한 행복을 모두 가졌다. 이제 고기리 시기를 맞이하여 계속적인 노력으로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기를 작업실을 자주 오고갔던 지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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